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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1년 동안 전남일보에 '오디오 산책'이라는 이름으로 연재되었던 글들을 계절별로 재구성하여 묶어보았습니다.
 
 
시작해야 한다 곱게 접은 하얀 손수건
거듭나야할 대학가요제 완전한 콤비
감성적 연애대장들 <어버이노래> 없는 세태
김종률 초대합니다
노래와 무용의 차이? 외롭지 않은 섬
상업은행 앞 하얀 목련 립스틱 짙게 바르고
 
 
 

시작해야 한다

성공한 모습은 보기 좋다.

성공한 후에 밝혀지는 성공까지의 고생담은 성취해 낸 그 모습에 빛을 더하기도 한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스타가 되는 꿈을 키우며 그많은 고생들을 달게 받아들인다.
자장라면 하나를 끓여 놓고 매니저와 가수가 서로 '나는 밥을 먹었다'고 거짓말을 하며 양보했다는 이야기며(필자), 녹음실에서 청소해주며 가수들 녹음 중 식사할 때 끼니를 해결했다는 전설(김흥국), 어렵사리 만든 첫 번째 레코드를 들고 방송국 앞에서 출근하는 PD들에게 자기소개를 하며 레코드 전하기를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는 이야기(나훈아) 등 고생담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데뷔곡 '그대는 모르시더이다'의 최성수.
정말 그대를 몰라준 세월이 9년 여였고, 포유동물이 낸 수 있는 최고의 감각적인 허스키보이스라는 찬사를 받는 '사랑의 썰물'의 임지훈도 처음엔 필자보다 훨씬 미성이었는데 그런 소리로 변하게 한 것 역시 10여 년의 무명세월이었다.
이 두 사람의 경우 필자는 누구보다도 가까이서 이들의 고통스런 세월을 지켜봤다.
이들은 수많은 어려움에 좌절하지 않았고 무섭도록 진지한 노력으로 그 세월을 이겨냈다. 역시 이광조의 어려운 시절 이야기다. 명동입구의 조그만 카페에서 무명답게 마지막 스테이지를 맡아 노래할 때다. 스테이지에 올라가기 전에 화장실에 갔는데 주방장이 일을 보고 있었다. 같이 일을 보며
주방장 : 나는 이광조씨 노래하는 시간이 가장 좋아요.
이광조 : (속으로) 아! 드디어 내 음악을 알아주는 사람이 나타났구나.
주방장 : 왜냐면요. 이광조씨 노래끝나면 퇴근하잖아요.
오늘날의 이광조는 웃으면서 이 얘길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일을 시작했을 때 실패할 수도 있다. 반대로 성공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시작이 없으면 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어쨌든 시작해야 한다. 그것이 비록 끝이 보이지 않는 고통스런 세월의 시작일지라도

 
 
 
 

거듭나야할 대학가요제

"나 어떡해 너 갑자기 가버리면 나 어떡해 너를 잃고 살아갈까. 나 어떡해 너 갑자기 떠나가면 그건 안돼 정말 안돼 가지 말아..."
샌드 페블스라는 서울대학의 그룹사운드가 불러 제 1회 대학가요제에서 대상을 수상했던 <나 어떡해>다.

또 하나의 노래. "노을이 지는 저녁무렵은 먼 산도 이만큼씩 다가와 앉고... 어디선가 부부들의 다투는 소리 그 소리조차 이 시간에는 아! 삶을 인정하는 열정이어라... 장난감 가게 앞에 호주머니를 뒤적이는 아빠의 마음..."
같은 대회에 전남대표로 참가. 동상에 그친 전남대학 <소리모아>의 <저녁무렵>이다.

어느 노래가 더 대학가요 다운가? 당시 고등학교에 다니던 필자는 대학가요제가 방송되던 날 굉장한 설레임으로 TV 앞에 앉아 이 방송을 지켜보았다. 출연자들의 자유스러움, 신선함은 충격이었고 저 가요제에 나가기 위해서라도 대학은 꼭 가야 되겠다는 우스운 생각을 했다. 그들 노래의 신선함은 당시 유행하던 노래와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당시 대학문화는 감각적이고 상업적인 사회의 것과는 분명 차이가 있었다고 믿는다. 말그대로 대학문화였다.

그러나 회를 거듭할수록 이 둘의 차이는 좁혀들기 시작했고, 이제는 도대체 대학가요제라 이름할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들 지경이다. 학생들의 정서가 이렇게 표현할 수 있는 것인가? 여기에 대한 책임을 묻는다면 과연 누구에게 인가? 건전한 대학문화의 육성을 통해서 이 사회에 건강함을 수혈하는 것이 목적이 되어야 할 대학가요제에 상업적 손익계산을 해대는 기성인들이 비난을 받아야 한다. 이 음반의 판권이 얼마만큼의 이익을 남기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1회 대회의 <나 어떡해> 대상, <저녁무렵>의 동상 수상으로 이 가요제의 앞날은 이미 결정되었다. <저녁무렵>이 대상이 되었다면 결과는 전혀 달라졌으리라는 필자의 주장은 너무 억지일까?

대학가요제는 다시 태어나야 한다.

 
 
 
 

감성적 연애대장들

"이 노래 히트하겠는데?"
처음 듣는 노래를 두고서 친구가 하는 말이다.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그 노래에 대단한 매력을 발견했나보다. 한 노래를 두고서 이런 느낌을 갖는 사람들이 많으면 그것이 바로 히트곡이다. 작사가, 작곡가 그리고 가수들이 수없이 많은 노래를 매일 만들어내지만 막상 알려지는 노래는 그렇게 많지 않다. 노래가 히트하는 요인은 너무나 복잡하고 미묘한 것이어서 "이것이다"라고 딱 꼬집어 얘기하기가 참 어렵다.

대중가요에 사랑과 이별을 노래한 것이 많은 이유는 사랑, 이별이 사람들의 보편적 정서 중에 가장 보편적인 것들이기 때문이다. 역시 이 보편적 정서를 가진 필자의 경우 노래말에서 가슴 절이는 느낌을 받고 좋아하게 된 노래들이 몇 곡 있다.

"... 살아가는 동안 한 번도 안 올지 몰라 사랑이라는 감정의 물결. 그런 때가 왔다는 건 삶이 주는 선물 지금까지 잘 견뎌왔다는..." 박주연 글, 이덕진 노래의 <내가 아는 한 가지>의 한 소절이다. 사랑이 지금까지 잘 견뎌온 보상으로 삶이 주는 선물이라니...
박주연이라는 사람을 꼭 한 번 만나보고 싶었다.

양인자씨가 쓴 조용필의 <킬리만자로의 표범>을 듣고서는 사랑을 하면서 까닭없이 느껴지던 외로움에 대한 해답을 얻었다. "... 사랑이 외로운 건 운명을 걸기 때문이지. 모든 것을 거니까 외로운 거야..."

또 이별하는 장면을 감각적으로 쓴 이영훈의 노래말이 있다.
"... 탁자 위에 물로 쓰신 마지막 그 한마디 서러워 말로는 못하고 그대여 이젠 안녕..." 이문세와 고은이가 함께 부른 <이별 이야기>이다. 어느 커피숖에서 두 사람이 헤어지고 있다. 차마 입을 열어 하지 못하고 탁자 위에 떨어진 물방울을 가지고 손가락으로 안녕이라 쓰는 모습을 생각하며 괜히 서러워졌다면 내마음이 너무 여린 탓일까?

"... 등이 휠 것 같은 삶의 무게여..." 라고 외치는 백창우에 와서는 '아!' 탄성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이 감성적 연애 대장들에게 오늘 저녁 차 한잔 사고 싶다.

 
 
 
 

김종률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 한평생 싸우자던 뜨거운 맹세.../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임을 위한 행진곡>이다.

80년 5월 광주에서의 엄청난 사건 이후에 모두가 속으로 울분을 삭이며 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 언제부터 인가 누구에게서부터 인지는 모르지만 이 노래는 불려지기 시작했다. 살아서 부끄러웠던, 두려움에 숨도 쉬지 못하던 우리에게 먼저 가신 임들의 목소리로 다가왔었다.
한사람, 한사람의 잠든 양심을 흔들어 깨우며 들불처럼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이 노래. 어떤 시위에서건 깃발처럼 앞장섰던 <임을 위한 행진곡>을 만든 이는 바로 김종률이다. 강진에서 태어나 광주일고와 전남대 상과대학을 졸업했다. 80년 5월의 현장을 두눈 똑똑이 뜨고 지켜보았던, 그리고 그 시대의 진실을 외면하지 않았던 김종률.

그가 맨처음 우리 앞에 나타난 건 79년. 당시 전일방송에서 주최한 <전일대학 가요제>에 참가해 대상을 받으면서부터다. 대상곡은 <소나기>. 황순원의 소설 <소나기>의 소년과 소녀를 노래했다. 그는 계속해서 MBC 대학가요제에서 <영랑과 강진>으로 동상을 수상했다.

"남으로 남으로 내려가자/그 곳 모란이 활짝 핀 곳에/ 영랑이 숨쉬고 있네..." 영랑의 고향이면서 자신의 고향이기도 한 강진을 영랑의 시와 더불어 절묘하게 노래했다. 그러나 이 노래는 불행하게도 금지곡이 되었다. 금지곡이 된 사유가 가관이다. "남으로 남으로 내려가자? 이거 빨갱이들 노래 아냐?"는 것이었다. 어처구니 없게도 이 노래는 우리 곁에 머물지 못하고 말았다(물론 지금은 들을 수 있지만).

모든 이에게 다정다감하고 따뜻한 사람, 몇 사람이 모인 자리이건 좌중을 쥐고 흔드는 유머가 풍부한 사람, 두주불사로 밤을 새우던 사람, 지금은 한 샐러리맨으로 엄청 성공한 사람, 고향을 사랑하고 무엇보다도 시대의 진실을 외면하지 않았던 사람. 김종률 형... 그가 보고 싶다.

 
 
 
 

'노래'와 '무용'의 차이?

현대무용 하시는 선생님 한분에게 테이프를 선물한 적이 있었다.
전교조 파동으로 여러 선생님들이 정든 교실, 정든 제자들 곁을 강제로 떠나야 했던 시절에 제주전교조지부 초청으로 제주교육대학에서 선생님, 학생들 앞에서 장장 두시간 동안 노래를 했었다. 눈물로 범벅이 된 공연이었고 그랬던만큼 노래도 더욱 절절한 마음으로 불렀던 것 같다. 바로 그 테이프를 선물했던 것이었는데 느낌이 좋았던지 무용작품을 만드는 데 배경음악으로 쓰고 싶다 하셨다.

물론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 때 선생님께서는 더욱 적극적인 제안을 하셨다. 필자가 무대에서 직접 노래를 하면 어떻겠느냐는 것이었다. 곰곰 생각해보니 훨씬 생생한 느낌을 전달할 수 있을 것 같고 해서 그렇게 하기로 했다. 뛰어난 안무 덕으로 노래도 빛나고, 작품도 감동적이었다.

문제는 공연 당일 발생했다. 문예회관 대극장 무대위에 대중 가요를 부르는 가수는 오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게 무슨 말인가. 그렇다면 이전에 그 무대에 섰던 다른 가수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왜 필자는 되지 않는 것인지 납득할 수 없었다. 아직까지도 거기에 대한 해명은 없다. 그렇다면 녹음으로 하는 것은 괜찮다는 것인가? 또 그 작품에서 무용으로 표현되어지는 5월 정서는 무엇이란 말인가?(노래로 공연하면 안되는 것이 무용이면 된다?) 안된다는 이유 치고는 너무 옹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녹음테이프에서 필자는 목이 터져라 외치고 있었다. ...만세! 만세! 민주주의여 만세!

 
 
 
 

상업은행 앞 하얀 목련

'하얀 목련이 필 때면 다시 생각나는 사람 봄비 내린 거리마다 슬픈 그대 뒷모습...'
늦은 감이 있지만 요맘때쯤 들려오는 양희은의 <하얀목련>은 봄이 왔음을 느끼게 하고 설레임을 준다. 어떤 시인은 목련이 피는 것을 보고 '나무가 하얀 붕대를 풀어내고 있다'라고 하였다.

필자가 군에 있을 때 한 후배 여학생이, 목련꽃이 피고 있는 잔디밭에 앉아 웃고 떠드는 새내기들의 모습을 편지에 담아보낸 적이 있다.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빛나고 있을 꽃의 모습과 새내기들의 풋풋함이 있을 교정을 그려보며 코끝이 찡함을 맛보았었다. 목련은 어디서건 쉽게 볼 수 있어서 좋다. 산장쪽에서 내려오다 만나는 산수동 장원국민학교의 목련은 해마다 아름다움을 더해간다. 담장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는 목련의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모두가 화사하고 당당하지만 슬퍼보이는 목련 하나를 이 도시에서 보았다. 금남로 상업은행 앞 목련이다. 다른 꽃보다 조금은 늦게 피고 지는데 햇빛을 제대로 받지 못해 그러지 않나 싶다. 바삐 지나는 행인들에게 '나 여기 있어요'라고 외치지만 사람들은 듣지 못하고 지나쳐간다. 그래서인지 대부분 다른 목련은 하늘을 향해 곧게 뻗어 당당한 반면 상업은행 앞 목련은 손을 모아 입에 대고 안타깝게 무엇인가 얘기하는 모습이다.
화려한 옷과 화장품, 향수에 의해 만들어진 사람들의 아름다움을 비웃는 건 아닌지. 아니면 쇼핑을 마치고 부모의 손을 잡고 돌아가는 어린아이에게 친구하자는 소리? 밤늦게 살짝 실례하는 취객에게 "정신차려 이친구야" 이러는 건 아닐까?

그런데 필자는 몇 년 전에 목련의 외침을 들었다. "최루탄을 아무리 퍼부어도 꽃은 필거야" 5월의 금남로에서 였다.
'...그대 떠난 봄처럼 다시 목련은 피어나고 아픈 가슴 빈 자리엔 하얀 목련이 진다.'

 
 
 
 

곱게 접은 하얀 손수건

'헤어지자 보내온 그녀의 편지 속에 곱게 접어 함께 부친 하얀 손수건...'
트윈 폴리오가 부른 하얀 손수건이다. 아마도 지금 30-40대들이 갖는 이 노래에 대한 느낌은 유난할거라 믿는다.

하얀손수건이 들어 있는 트윈폴리오의 음반은 우리 가요사에서 하나의 사건이다. 60년대 후반 우리 가요계에서 주도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트로트계열의 노래들이 당시 젊은이들에게 충족감을 주지 못했던 것 같다. 이미 비틀즈에, 그리고 엘비스에 환호를 보내던 그들에게 이러한 노래들은 그들의 감성과는 전혀 별개의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통기타가 등장해 폭풍처럼 전국의 젊은이들 사이를 휩쓸어 버렸다.

그러나 당시는 오디오의 보급이 많지 않았던 관계로 음악을 듣기 위해 라디오에 귀를 쫑긋해야 했고, 음반도 지금처럼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런 환경에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것이 바로 음악감상실이었다. 수요가 공급을 창줄해낸 것이고 이른바 젊은이들의 문화공간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이 공간에서 감상만으로 만족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 있었으니 그들이 바로 송창식, 윤형주 등이다. 이들은 세시봉이란 음악감상실에서 만나 다른 한 사람과 더불어 트리오로 노래를 시작했다. 팀의 이름도 가게이름을 딴 세시봉. 그 당시 외국 노래를 번안해 불렀던 노래가 바로 하얀손수건이다. 이 노래는 음반작업 이전에 크게 히트했다.

세시봉은 세 사람 중에 한 사람이 빠져나가 송창식, 윤형주 두 사람이 활동을 계속했고 얼마 후에 두 사람도 각자 솔로의 길을 가게 된다. 그러나 두 사람의 화음을 사랑하던 주위의 권유로 팀 해체 후에 만든 음반이 바로 이 유명한 트윈폴리오 라사이틀이다.

이 음반으로부터 가요계는 통기타 홍수에 빠져들게 되고 청바지 문화로 대변되는 통기타문화가 전국의 젊은이들에게 열병처럼 번져가게 된다. 그런데 이 음반에 수록된 전곡이 번안곡이었던 걸로 보아 창작시대는 조금 시간이 지나서야 가능했던 것 같다.

 
 
 
 

완전한 콤비

해태의 한대화와 선동열의 협조는 해태를 한국프로야구의 정상으로 끌어올렸다. 그래서 요즈음 해태의 부진을 한대화의 이적에서 찾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가요계에서도 많은 명콤비들이 있다. <박춘석+남진> <길옥윤+혜은이> <변진섭+하광훈> <이영훈+이문세> 등 가수와 작곡자 사이의 명콤비들이 많은 편이다. 어떤 작곡자의 곡을 꼭 그 가수가 불러야 한다는 법은 없지만 어쨌든 명콤비 사이에 유난히 히트곡이 많은 것을 본다. 또 두 사람이 결별하고서 양쪽 다 빛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 걸 보면 콤비라는 말이 실감난다.

작사자와 작곡자 사이의 명콤비도 있다. 알고싶어요(이선희), 그 겨울의 찻집, 킬리만자로의 표범(조용필), 접시를 깨뜨리자, 타타타(김국환) 등 위에 열거한 곡들을 한 콤비가 만들어 낸 것이라면 두 사람의 콤비네이션은 거의 환상적인 것임에 틀림없다.
명콤비 중에서도 양인자, 그리고 김희갑 두 사람은 화제의 주인공. 이 두사람 사이의 정신적인 교감은 다른 콤비들에 비해서 유별난 것 같다. 결국 이런 감정들이 쌓여서 사랑으로까지 발전했지만.

'달 밝은 밤에 그대는 무슨 생각을 하세요. 잠이 들면 그대는 무슨 꿈 꾸시나요' <김희갑+양인자>곡에 이선희가 부른 <알고싶어요>다. 이 노랫말과 멜로디를 들으면서 10대들의 사랑과 마흔을 넘긴 중년의 사랑, 둘 사이에 조금치의 차이도 없음을 알았다. 김,양 두 사람은 열애를 했다. 늘 김희갑씨가 양인자씨를 집에 데려다주곤 했던 모양이다. 여느 때처럼 집에 바래다주고 아쉬운 발길을 돌리는데 작사가가 불러세웠다.

"오늘 집에 가셔서 편지 한 장 쓰세요. 당신 마음이 담긴 글을 받고 싶어요."그러마고 작곡자는 돌아섰다. 그런데 잠시 후에 작사자 집의 초인종이 울렸다. 늦은 시간에 깜짝 놀라 문을 연 작사자 앞에 작곡자가 서 있었다. "편지 대신 내가 왔소"
얼마 있지 않아 두 사람이 한집에서 살기로 했다는 소식이 온 동네를 떠들썩하게 했다. 완전한 콤비가 된 것이다.

 
 
 
 

'어버이노래' 없는 세태

<비내리는 고모령> <부모> <모정의 세월> <아빠의 청춘>.
얼핏 생각나는 어머니, 아버지와 관련된 노래들이다.

필자가 어렸을 적, 부모를 주제로 한 노래들이 심심찮게 발표되었고 이런 노래들이 대중적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던걸로 기억한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80년대 이후라 여겨지지만) 이런 노래들을 듣기가 어려워졌다. 소위 신세대를 주도하는 젊은 작곡, 작사가들이 많이 나오고 가요의 폭도 그만큼 넓어졌지만 거기에 비하면 이런 노래들이 너무 없다는 생각이 든다.
있긴 있었다. 칠갑산이다. 그러나 이곡 EH한 <조흔파>라는 대 선배분의 작품이다.

요즈음에 나온 노래 중에 <마마보이>라는 노래가 있다. 이 노래를 들으면서 생기는 의구심이 있었다. 도대체 세대간의 어떤 차이가 이렇게 다른 노래를 만들게 하는가. 심리학을 하신 상담전문가에게 이 문제에 관해 질문을 해 보았다.
지금 아이들의 부모 세대는 자신들이 자랄 때에, 상대적으로 물질의 궁핍을 겪고 자랐다는 것이다. 어머니의 젖과 같은 정과 사랑은 느끼면서 자랐지만 그 시절 물질의 궁핍은 그들이 느낄 수 있는 가장 표면적인 결핍이었던 것이다. 이런 이유로 그들에게 가장 부족했던 것을 지금의 자녀들에게 채워줌으로써 부모의 역할 중에 가장 큰 의무를 다한 것으로 착각하고 다른 것에 소홀하게 된다. 주기는 주되 가슴을 주지는 못하는 것이다.

향상된 지적 수준을 가진 요즘 젊은 엄마 아빠들은 다양화된 정보를 통해서 자녀교육방법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생각은 가되 실천으로 연결되지는 않은 것 같다. 한마디로 <양육태만>이다. 이런 세월이 길어진다면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에 자녀들이 바치는 노래 한 곡 없는 어버이날을 맞이할까 두렵다. 도리어 어린이날 <마마보이>를 열심히 불러주고 있지나 않을지...

앵무새들의 합창으로 들리던 어버이날이었다.

 
 
 
 

초대합니다

작년 5월 18일에 진주경상대학의 초대를 받아 공연을 하러 갔었습니다.
공연에 앞서 <아침에 방송된 망월동의 TV 중계를 보았느냐>고 물었더니 아무도 보지 못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렇게도 바라던 문민정부가 들어섰음에도 5.18은 여전히 한반도 한쪽 동네의 몫일 수밖에 없었던 거지요.

어떤 분들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이제 그만하지. 할만큼 했쟎아? 다른 지역에서 바라보는 시선이 따갑지도 않느냐?"는 것입니다. 따갑다니요? 우리 역사에서 5.18은 패배한 것이고 그로 인해서 부끄럽다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5.18이 있기에 광주는 세계적으로 빛나는 도시, 우리는 명예로운 시민이 되는 것입니다. 곧 이나라의 자존심인 거지요.

5년 전, 그때까지 소수의 용기있는 분들이 하시던, 5월과 관련한 여러 가지 실내에서의 문화행사를 지켜보며, 이곳까지 오시는 분들이라면 이 공연을 보지 않아도 5월을 충분히 공감할 거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열린 공간으로 나가야 된다' 그 순간에 스치는 생각이었습니다. 5.18 추모거리굿. 시작은 작았지요. 그러나 어언 5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온 나라의 뜻있는 문화패들은 누구나 참여하고 싶어하는, 신발을 신고 감히 밟을 수도 없는 금남로에 서는 것만으로도 영광스러워하는 행사가 되었습니다.

마르코스를 몰아냈던 시민혁명의 주역이었던 필리핀의 민중가수도 우리의 5월을 축하하기 위해 옵니다. 광주 5.18은 분명 승리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온 나라의 축제, 아니 세계적인 축제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바라는 해방된 금남로의 모습은 1가에서 춤을 추고, 2가에선 풍물놀이를 하고, 3가에선 시낭송을 하고, 4가에선 노래공연을 보고 들을 수 있고... 그리고 연도에는 어린이의 손을 잡은 일가족이 나와 흥겨워하고, 또 그 속에는 민주화의 성지 광주를 보러 온 세계 여러나라 사람들이 섞여 있는 축제, 바로 그것입니다.

벽돌 한 장 같이 쌓지 않으시렵니까? 19,20,21일 오후 6시 30분 금남로에서 뵙겠습니다.

 
 
 
 

외롭지 않은 섬

80년 5월 당시 광주의 모습이 마치 외로운 섬 같다라는 느낌으로 만들어진 곡이 <바위섬>이다.
불의에 맞서, 역사적인 '도전'에 대한 피로써 올바른 '대응'을 하던 당시 광주의 모습이 14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외로운 섬 같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러나 외롭지만은 않게 하는 것이 있다.

이번으로 다섯 번째 맞는 <5.18 광주 민중항쟁 추모 거리굿>이 그것이다. 5년 전 최루탄이 난무하던 이곳 금남로에서 <광주지역 노래모임협의회> (소리모아, 정세현, 가톨릭청년놀이패 <흙>, 노래패 <소리>, 김원중)을 통해 이곳 광주만의 목소리로 시작했던 것이 어느 사이엔가 전국적으로 하나 되는 소리가 되었고 이제는 세계를 향해서 외치는 소리가 되어가고 있다.

재작년 이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달려오다 차가 전복되어 팀의 대부분이 부상을 입은 와중에 그 중 성한 두 사람이 기어코 금남로에 서서 우리를 따뜻하게 덥혀주고 다친 부인의 안위 때문에 먼저 가겠노라던 대구의 <소리타래>. 불러주지 않아도 스스로 찾아와 여러분을 만나겠다는 서울지역의 희망의 노래 <꽃다지>, 그리고 김영남. 동료들이 국가안보법에 의해 구속되어 힘든 중에도 자리해준 부산의 <희망새>. 그리고 전주의 대학생 가수 박미영. 제주의 삼 <섬 하나 산 하나>, <소리왓>. 매년 찾아주는 성남의 <노래마을> 그리고 무등산 전망대에서 광주를 내려다 보며 Let My Guitar Speak (나의 기타로 말하게 하라)를 부르고선 나도 이제 광주의 아들이 되었느냐던 필리핀의 제스 마누엘 산티아고.

이들의 리듬에 맞추어 춤추고 노래하는 시민, 전투경찰, 아빠에게 무동 태워진 아가, 멀리 찾아주어 고맙다며 꽃 한송이 건네주던 지체 부자유아 등의 모습에서 눈물로 흐릿한 필자의 눈은 외롭지 않은, 결코 외로워선 아니되는 <섬> 하나를 보고 있었다.

 
 
 
 

립스틱 짙게 바르고

"내일이면 잊으리 꼭 잊으리... 마지막 선물 잊어주리라 립스틱 짙게 바르고..."

요즈음 주부들 사이에 널리 애창되고 있는 임주리의 <립스틱 짙게 바르고>라는 노래다.
7년 전에 이 노래를 발표하고서 임주리는 별 반응이 없어 미국으로 가 버렸다. 그런데 점점 이 노래가 알려지기 시작하더니 요즈음 가장 인기있는 곡 중의 하나가 되었다. 임주리는 다시 귀국을 했고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가수활동을 다시 시작했다.

필자는 왜 이노래가 '주부'들 사이에서 그렇게 인기를 얻고 있는 것일까 생각해 보았다. "... 마지막 선물 잊어주리라 립스틱 짙게 바르고..." 란 구절을 불러 보면서 시대가 변화했음을 알 수 있었고 그것이 바로 히트하게 된 요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필자의 어머니 세대를 포함한 그 이전 세대에선 꿈도 꿀 수 없었던 여인의 선언이 거기에 있었던 것ㅇ다.

삼종지도라는 말이 있다. 어려서는 아버지를 따르고 시집가서는 남편을, 그리고 남편을 여의었을 때 아들을 의지해 살아야 하는 인생이 바로 그들의 삶이었다. 그러나 이 노래는 통상적인 사회의 관념 속에서 여인들 앞에서 군림할 수 있었던 남성들의 호시절에 종말을 고하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의 "가지마오 가지마오 나를 두고 가지를 마오"가 아닌 "갈테면 가라 나는 새로운 삶을 위해 이제 립스틱을 다시 발겠다"는 이 선언은, 새로운 사고방식의 신세대 주부를 포함한, 가슴에 맺힌 한을 간직하고 살았던 여인네들에게 있어 어지 통쾌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남편들이여! 이제 아내들의 마음을 헤아려줄 때다. 이제 앞치마를 두르고 서투른 손놀림으로 접시를 깨뜨리더라도 주방에 서야할 때다. 이게 대세다. 남편들이 아내의 젖은 손을 따뜻하게 잡아줄 수 있다면 아내들은 오늘 저녁 남편을 위한 립스틱을 예쁘게 바를 것이다.

총각 주제에 이런 글을 쓰는 필자도 참 한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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